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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의 쓴소리와 권위 - 경기일보 2015.12.21 -

dd100 2015. 12. 23. 10:18

민주정치의 상징인 영국의회를 수년 전에 방문, 방청한 적이 있었다. 런던 테임스 강변에 위치한 고색창연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영국의회 의사당은 오랜 민주정치의 역사만큼이나 전통과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영국의회 견학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하얀색의 가발을 쓴 영국의회 의장의 역할과 권위였다. 상원과 하원의 양원으로 구성된 영국의회는 상원은 귀족으로 구성된 명예직이기 때문에 주요 의정활동은 하원에서 진행된다.

하원의장은 치열한 경쟁을 통한 투표보다는 주로 여당과 야당의 합의로 선출되기 때문에 다선의 원로의원으로 여야의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의원이 선출되는 것이 관례이다. 하원의장은 선출과 동시에 소속정당에서 탈당, 무소속이 되며, 동시에 의장의 상징으로 하얀 가발을 쓴다.

엄격한 중립을 지키며, 의회질서 유지에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필자가 방문 시 여야가 첨예한 쟁점을 가지고 토론을 전개, 여야 의원 간에 다소 소란스러운 장면이 전개되자 의장은 질서유지를 위한 ‘order(질서)’라고 말하자 의석이 일시에 잠잠해지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우리나라 국회에서 과거 여야 간의 심각한 견해차이가 있는 쟁점을 놓고 토론 중 국회의장의 사회 방식에 불만이 있을 때 의장석을 점령하는가하면 때로는 의장의 사회봉을 빼앗는 사례도 있었으며, 또는 국회의장의 의장석 입장을 저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폭력적인 행태는 영국의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얀 가발을 쓴 의장이 개회를 위하여 황금으로 장식된 지휘봉을 들고 호위관들의 경호를 받으면서 의장석으로 입장할 때 의원들과 관계자들이 기립하여 존경을 표시하는 장면에서 하원의장의 권위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최근 우리나라 국회의장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소위 국회선진화법으로 과거와 같이 국회의장석을 점령하는 꼴사나운 국회의원들의 행태는 사라졌지만 국회의장의 권위는 아직도 영국의회에 비하면 극히 낮은 수준이다.

청와대와 여당이 정의화 국회의장에게 특정 법안의 직권상정을 강하게 요구하는가하면, 야당 역시 직권상정을 못하도록 의장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국회의장은 삼권분립에 따라 입법부를 대표하는 수장임에도 불구하고 여야당은 물론 청와대로부터 존경이 아닌 비난, 또는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정도의 국회의장의 권위를 가지게 된 것도 지난 10월 14일 별세한 고 이만섭(故 李萬燮) 의장이 주도하여 개혁한 국회법 때문이다. 

고 이만섭 의장은 국회의장이야말로 여야당은 물론 청와대를 대변하는 의장도 아닌 국민을 위한 국회의장이라는 명분 하에 국회법을 개정, 의장의 당직을 이탈하게 함으로서 의장의 중립적 위치를 제도적으로 가능게하였다. 과거의 국회의장은 여당의 당적을 보유하고 있었고 또한 차기 선거도 의식하게 됨으로서 여당은 물론 청와대로부터도 자유스럽지 못하였으며, 때문에 국회의장의 권위는 아주 미약했다.

국회의장을 14, 16대 등 2회에 걸쳐 수행한 고 이만섭 국회의장은 의장 시절 의장석에서 사회봉을 칠 때 ‘한번은 여당을 보고, 한번은 야당을 보고, 마지막 한번은 국민을 보고 친다’라고 강조했을 정도로 국회의장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을 다했으며, 또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역대 대통령 모두에게 쓴소리를 한 한국 정치의 산증인이었다. 

정치를 권모술수보다는 국민을 위한 마음으로 해야 된다는 신념은 그의 저서 ‘정치는 가슴으로’라는 저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역대 2번째인 8선의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도 한 번도 정치자금 비롯한 어떤 스캔들에도 회자되지 않은 점에서 고 이만섭 의장의 강직한 성격과 의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지난 금요일 국회에서 거행된 고 이만섭 의장 영결식에서 정의화 국회의장은 영결사를 통하여 ‘국회의원은 계파나 당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부터 생각하라’ 말씀하시던 의장님의 호통소리가 우리 귀에 들리는 듯하다고 말했는데, 과연 현재 사면초가에 몰린 정의화 국회의장이 어떻게 입법부 수장으로서의 권위를 지킬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김영래 아주대 명예교수전 동덕여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