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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인의 영원한 표상, 이만섭 선배님

dd100 2019. 3. 5. 09:30

연정인의 영원한 표상, 이만섭 선배님

김영래(전 동덕여대 총장, 아주대 명예교수)

 

 

국회의장 이만섭 홀에서 시작한 50주년 재상봉 행사

 

지난 512일 토요일이다. 이날은 연세대학교 개교 133년 기념식이 있는 날이고 동시에 50주년 재상봉 축하 행사일이다. 당일 정치외교학과가 있는 연희관 4층 강의실에 재상봉 50주년이 된 1964학년 정치외교학과 입학생 30명과 재상봉 25주년의 1989년 입학생 후배 15명이 모였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재상봉 50주년과 25주년을 맞이하는 연세 정외인 45명이 모여 선후배 간 서로 인사를 나누고 김상준 정치외교학과장으로 학과에 대한 소개를 듣고 또한 재상봉 50·25주년 동문의 이름으로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 전달식도 있었다. 당일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50주년 재상봉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교를 찾은 김영회 동문은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산에서 자란 나무로 만든 십자가상을 모교에 전달하기도 했다.

당일 연정인의 50·25주년 재상봉 참석자들은 이어 연희관 401국회의장 이만섭 홀을 방문했다. 연정인들이 401국회의장 이만섭 홀을 방문한 것은 이번 50주년 재상봉 정치외교학과 준비위원장을 맡은 필자와 정치외교학과 19회 동기회장인 황계일 동문의 제안으로 이뤄진 것이다. 우선 우리 50주년 재상봉 동문들은 1960년대 중반에 공부를 하던 광복관을 기억하고 있지만, 당시 연희관은 이공대학의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생소한 건물이다.

따라서 현재 후배들이 공부하고 있는 연희관이 어떠한 건물인지 또한 강의실은 과거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한 동기생들이 많았기에 연희관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또 다른 생각이 있었으니, 이는 국회의장 이만섭 홀을 동기생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의도가 있었다.

이만섭 국회의장님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의 대표적 인물이고 또한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정치인이었기에 자랑스러운 선배님, 이만섭 국회의장님을 기리는 국회의장 이만섭 홀에서 재상봉 행사의 일부를 진행하는 것이야말로 50주년 행사의 의미를 더하고 또한 연정인의 자부심을 새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국회의장 이만섭 홀방문을 주선하게 된 것이다.

연희관 401국회의장 이만섭 홀에서 50·25주년 재상봉 연정인들은 김상준 정치외교학과장으로부터 정치외교학과의 발전상은 물론 국회의장 이만섭 홀의 헌정 과정을 설명들은 동기생들은 새삼 연정인의 긍지를 느끼게 되었다. 연희관에는 유엔 총회의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한승수 선배님의 한승수 홀도 있다.

동기생들은국회의장 이만섭 홀에 걸려 있는 이만섭 선배님의 부조를 보면서 자랑스러운 연정인의 선배님, 이만섭 국회의장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 또는 국회의장으로서 보여준 꼿꼿한 정치인의 모습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일 국회의원과 국회사무총장을 지낸 윤원중 동기생은 이만섭 선배님과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도 했다.

앞으로 이만섭 국회의장님과 같은 자랑스러운 연정인이 연희관에서 많이 배출되기를 기대하면서 연희관 401이만섭 홀에서 시작된 50주년 재상봉 행사에 대한 추억이 지금도 되새겨지고 있다.

 

연정의 밤에서 만난 국회의원 이만섭 선배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의 대표적 행사는 연정의 밤이다. ‘연정의 밤은 교수님을 비롯하여 재학생과 선배가 만나 연정인으로서 상호 우정을 나누는 대표적인 행사이다. 특히 후배들은 연정의 밤행사를 통하여 국회, 외무부, 언론계 등 한국정치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선배들을 만나 재학생 시절의 학교생활, 그리고 사회 진출에 관련된 여러 가지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연정의 밤행사를 상당히 기다리고 있었다. 실제로 이런 행사에서 만난 선배로부터 조언에 큰 영향을 받아 사회진출에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 동문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다.

당시 연정의 밤행사 주최는 정치외교학과 총동문회가 아니고 재학생 전체로 구성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회 실무위원회가 주관하여 행사를 진행하였다. 당시 필자는 재학생 전체의 직선으로 선출된 정치외교학회 실무위원장으로서 연정의 밤행사를 총괄, 준비하였다. ‘연정의 밤행사는 재학생 보다는 얼마나 많은 선배들이 참석하느냐가 중요했다. 재학생들은 특히 국회의원, 외교관으로 있는 선배들과의 대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당시 연정의 밤은 매해 겨울방학 직전에 개최되는 가장 중요한 정치외교학과 행사였다. 1966연정의 밤은 서울시청 구내식당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만섭 선배님은 당시 민주공화당의 전국구 출신의 초선 국회의원이면서 정치외교학과 총동창회장으로서 참석하여 축사도 해주시고 후배들에게 여러 가지 조언과 격려를 해주셨다. ‘연정의 밤의 참석자 좌석은 선후배가 같이 섞여 앉도록 배치되었는데, 이만섭 선배님이 있는 좌석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당시 국회의원 중에는 이만섭 선배님 이외에도 연정 출신의 다른 동문 선배 국회의원이 있었지만, 이만섭 선배님이 가장 후배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비록 당시 한일회담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 등으로 대학가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는 별로 없었지만, 민주공화당 소속인 이만섭 의원님에 대한 후배들의 지지와 성원을 상당히 큰 것으로 기억된다.

또한 이만섭 선배님은 후배들의 학구적 노력에도 상당한 격려를 해주셨다. 당시 연세대 정치외교학회에서 교수님을 비롯하여 대학원생, 학부 재학생들의 논문을 수록한 <정치학논총(政治學論叢)>이 발간되었다. 필자가 당시 정치외교학회 실무위원장으로 1967227일 발행한 <정치학논총 제8> 에는 학장 박관숙 교수님의 속간사’, 학과장 추헌수 교수님의 권두언’, 이만섭 동창회장님의 격려사’, 실무위원장 김영래의 인사의 말이 실려 있는 것을 최근 이글을 쓰기 위해 자료정리를 하다가 발견하였다.

당시 이만섭 동창회장님은 격려사에서 정치적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조국의 장래를 걸머질 우리 정치학도들에게 새로운 사명감을 불어넣어 주고 과학적인 총명과 힘찬 의욕을 불러 일으켜 줄 활력소-우리 <정치학논총>은 바로 이것이 되어야 한다 고 말씀하셨다.

 

한국정치학회 발전에 큰 도움을 주신 이만섭 국회의장님

 

대학의 정치외교학과와 국회는 상호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국회가 정치의 본산인 것과 같이 정치외교학과는 정치를 학문적으로 배우는 곳으로 학문 발전 뿐만 아니라 현실정치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외교학과 출신 중에는 국회의원 지망생이 많다. 특히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의 많은 동문들은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사례가 많아, 특정 시기에 연정 출신 국회의원은 10명이 넘은 된 경우도 있었다.

이 중 국회의장으로 활동한 연정 출신은 이만섭(‘50 ) 선배님과 김원기(‘55 ) 선배님이며, 부의장으로 활동하신 동문은 오세응(’53 ) 선배님과 조부영(‘56 ) 선배님이다. 이만섭 선배님은 두 번에 거쳐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는데, 두 번째로 국회의장을 하시던 시기인 2001년에 필자는 한국정치학회장으로 선출되어 봉사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정치학회는 사단법인으로 국회에 등록된 학술단체이기는 하지만 학회장의 역량에 따라 국회로부터 학술활동 지원비를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학회 운영과 학술활동의 범위가 좌우되기도 했다. 학회장의 가장 큰 역할을 외부로부터 많은 학술연구비를 수주하는 것인 바, 필자는 비교적 그런 능력이 약해서 학회활동이 위축될 수 있지 않을까 상당히 염려했다. 그러나 다행이 한국정치학회장 재임 시 이만섭 선배님이 국회의장으로 계시어 정치학회 연구비로 상당한 지원을 받았다. 2001111일자 필자의 일기장에 보면 당시 국회 사무처에 근무하던 이재도 선배님(‘59 )으로부터 국회가 한국정치학회에 5천만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지원금은 당시 유사 학회의 경우, 일년 예산과 비슷할 정도로 큰 액수였다. 이는 국회의장이신 이만섭 선배님의 덕분이었으며, 이는 당시 한국정치학회 학술활동과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한국정치학회는 당시 한국정치의 주요 현안에 대한 학문적 토론을 위하여 한국정치포럼을 개최하였는바, ‘4차 한국정치포럼2001322일 목요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되었다. 당일 포럼 참석자들을 위한 리셉션이 포럼 종료 후 개최되었는데, 이것 역시 이만섭 국회의장 초청으로 성황리에 개최되어 포럼의 성공적인 개최를 축하해 주시고, 또한 정치학자들의 학문연구를 격려하여 주신 이만섭 선배님의 배려가 새삼 되새겨 진다.

 

내나라연구소학술회의에서 기조강연

 

사단법인 내나라연구소는 1960년대 연세대의 대표적인 이념동아리인 <한국문제연구회> 선후배가 설립한 학술연구단체이다. 한흥수(‘55 ) 교수님, 김만규 전 인하대 사회과학대학장님(‘59 ), 안성혁 당시 총학생회장(행정 ’60 ) 등이 한국문제연구회 초기의 고문 및 창립회원의 대표적인 동문이다. 1994630일 김만규 교수님의 주도로 설립된 내나라연구소는 한국의 주요 정치·경제·사회· 교육 등 주요 현안에 대한 세미나, 포럼 등을 개최, 발표와 토론된 내용을 <내나라> 기관지로 발간, 국회, 정부 등 주요 기관, 여론주도층에게 배부하고 있다.

필자는 현재 내나라연구소 이사장으로 있는 바, 2008117일 국회헌정기념관에서 바람직한 정부형태와 헌법개정이란 주제 하에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는데, 당시 이만섭 선배님이 기조강연 겸 축사를 하여 주셨다. 당시 이 선배님이 전직 국회의장으로서 실제 정치에서 경험하신 여러 가지 말씀과 더불어 헌법 개정 시 이원집정제를 강력하게 주장하시였는바, 기조강연 내용은 <내나라>17(200811월 발간)에 실려 있다.

당시 이만섭 국회의장님은 학술회의 기조강연에서 헌법개정의 필요성과 과제라는 주제 하에 첫째, 대통령 중심제는 대통령이 독선과 아집으로 흐를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둘째, 대통령 한 사람이 절대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대통령 한 사람으로 인해 그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5년이라는 시간 동안에는 대통령이 아무리 잘못을 해더라도 대통령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현행 5년 단임 대통령 중심제의 문제점을 지적하셨다.

이에 이만섭 국회의장님은 개헌은 대통령 중심제를 고집하기 보다는 대통령은 외교·안보를 맡고 내정은 국무총리한테 맡기는 것이다. 국민이 원하는 대로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고, 국무총리는 다수당에서 뽑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원정부제 또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도입을 주장하셨다.

 

청송회를 작명하신 영원한 연세인

 

이만섭 선배님은 존경받는 원로 정치인으로서 다양한 모임을 주도하시면서 활동하시였다. 특히 연세출신의 선후배들과 많은 모임을 갖고 계신데, 필자가 이만섭 선배님과 작고하시기 수년전부터 가진 모임은 청송회(聽松會)란 모임이다. 일명 연정회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 모임에는 윤형섭(‘53 ) 교수님, 한흥수 교수님 등 정치외교학과 출신 교수님을 비롯하여 선후배가 참여하고 있었다.

청송회란 모임의 명칭은 이만섭 선배님이 아이디어를 내시어 작명된 것이다. ‘들을 청()’, ‘소나무 송()’이란 이름을 딴 것은 아마 재학시절에 자주 찾던 연희동산 청송대를 회상하시어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연희동산 청송대가 푸를 청()’이 아닌 들을 청()’이라고 하시면서 이를 강조한 것은 평소에 정치인으로서 민심에 귀를 기우리고 소나무와 같이 지조를 지키는 자세를 염두에 두시고 작명을 하신 것 아닌가 생각된다.

청송회 모임을 통하여 연정 선배님들의 재학 시 활동이나 학교와 관련된 여러 가지 숨은 비화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를 이만섭 선배님, 윤형섭 교수님 등으로 들을 수 있었다. 연대 재학 시 털보 응원단장으로 연고전에서 고대를 제압한 일, 통학시 버스에서 있었던 이화여대 학생들과의 재미있는 에피소드, 총학생회장 선거 시 찬조연설에 얽힌 일화 등을 들었다. 특히 이만섭 선배님으로부터 공군사관학교 시절 폭력사태가 발생, 많은 동료 생도들이 퇴교를 당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기 위해 생도회장으로 혼자 모든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아 퇴교 당함으로서 동기생들의 퇴교를 막은 사건도 자세히 들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여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으셨든 일, 모교인 대륜중학교 체육교사로서 은사였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 개인적인 인연 등등에 대한 정계 야사도 들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개략적인 사실들은 이만섭 선배님의 <5·1610·26: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나> (나남, 2009) 등과 같은 자서전, 또는 정치회고집에 나와 있기는 하지만 청송회 모임에서 생생하게 들음으로서 더욱 실감을 하게 되었고 또한 인간적인 모습, 책임지는 리더로서의 이만섭 선배님을 엿볼 수 있었다.

 

국회의 권위를 지키신 쓴 소리의 국회의장

 

청송회 모임에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지만, 이만섭 선배님은 한국정치의 산증인뿐만 아니라 스스로 삼권분립의 한 주체인 입법부의 권위를 국회의장으로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8선의 국회의원을 지내시면서 불법정치자금 수수 등 정치부패와 관련된 스캔들은 한건도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깨끗한 정치인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어느 사석모임에서 대기업 총수가 연세 동문임에도 불구하고 이만섭 국회의장님으로부터는 한 차례도 정치자금 요구를 받은 적이 없었다고 하면서 참으로 본받을 정치인이라 것을 이야기 들은 적이 있다.

국회의장으로 계실 때 국회 개혁을 가장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국회의장의 중립성·공정성 담보를 위해 영국의회와 같이 의장의 당적이탈, 국회의장에 대한 청와대로부터의 독립성 확보, 국회의장의 날치기 사회거부 등을 몸소 실천하여 그 후 국회의장상의 모델이 되었다. 특히 민의의 전당인 국회가 행정부의 시녀가 되어서는 민주주의 발전할 수 없다는 신념 하에 입법부의 권위를 지키는데 혼신을 다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이만섭 선배님의 정치적 신념과 국회의장으로서의 권위를 지키신 것에 많은 감동을 받아 선배님 사후 이를 나름대로 기리기 위해 필자가 객원논설위원으로 <경기일보>김영래 칼럼(20151222)국회의장의 쓴 소리와 권위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

 

민주정치의 상징인 영국의회를 수년 전에 방문, 방청한 적이 있었다. 런던 테임스 강변에 위치한 고색창연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영국의회 의사당은 오랜 민주정치의 역사만큼이나 전통과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영국의회 견학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하얀색의 가발을 쓴 영국의회 의장의 역할과 권위였다. 상원과 하원의 양원으로 구성된 영국의회는 상원은 귀족으로 구성된 명예직이기 때문에 주요 의정활동은 하원에서 진행된다.
하원의장은 치열한 경쟁을 통한 투표보다는 주로 여당과 야당의 합의로 선출되기 때문에 다선의 원로의원으로 여야의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의원이 선출되는 것이 관례이다. 하원의장은 선출과 동시에 소속정당에서 탈당, 무소속이 되며, 동시에 의장의 상징으로 하얀 가발을 쓴다.

엄격한 중립을 지키며, 의회질서 유지에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필자가 방문 시 여야가 첨예한 쟁점을 가지고 토론을 전개, 여야 의원 간에 다소 소란스러운 장면이 전개되자 의장은 질서유지를 위한 ‘order(질서)’라고 말하자 의석이 일시에 잠잠해지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우리나라 국회에서 과거 여야 간의 심각한 견해차이가 있는 쟁점을 놓고 토론 중 국회의장의 사회 방식에 불만이 있을 때 의장석을 점령하는가하면 때로는 의장의 사회봉을 빼앗는 사례도 있었으며, 또는 국회의장의 의장석 입장을 저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폭력적인 행태는 영국의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얀 가발을 쓴 의장이 개회를 위하여 황금으로 장식된 지휘봉을 들고 호위관들의 경호를 받으면서 의장석으로 입장할 때 의원들과 관계자들이 기립하여 존경을 표시하는 장면에서 하원의장의 권위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최근 우리나라 국회의장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소위 국회선진화법으로 과거와 같이 국회의장석을 점령하는 꼴사나운 국회의원들의 행태는 사라졌지만 국회의장의 권위는 아직도 영국의회에 비하면 극히 낮은 수준이다.

청와대와 여당이 정의화 국회의장에게 특정 법안의 직권상정을 강하게 요구하는가하면, 야당 역시 직권상정을 못하도록 의장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국회의장은 삼권분립에 따라 입법부를 대표하는 수장임에도 불구하고 여야당은 물론 청와대로부터 존경이 아닌 비난, 또는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정도의 국회의장의 권위를 가지게 된 것도 지난 1214일 별세한 고 이만섭(故 李萬燮) 의장이 주도하여 개혁한 국회법 때문이다. 고 이만섭 의장은 국회의장이야말로 여야당은 물론 청와대를 대변하는 의장도 아닌 국민을 위한 국회의장이라는 명분 하에 국회법을 개정, 의장의 당직을 이탈하게 함으로서 의장의 중립적 위치를 제도적으로 가능게하였다. 과거의 국회의장은 여당의 당적을 보유하고 있었고 또한 차기 선거도 의식하게 됨으로서 여당은 물론 청와대로부터도 자유스럽지 못하였으며, 때문에 국회의장의 권위는 아주 미약했다.
국회의장을 14, 16대 등 2회에 걸쳐 수행한 고 이만섭 국회의장은 의장 시절 의장석에서 사회봉을 칠 때 한번은 여당을 보고, 한번은 야당을 보고, 마지막 한번은 국민을 보고 친다라고 강조했을 정도로 국회의장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을 다했으며, 또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역대 대통령 모두에게 쓴 소리를 한 한국 정치의 산증인이었다

정치를 권모술수보다는 국민을 위한 마음으로 해야 된다는 신념은 그의 저서 정치는 가슴으로라는 저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역대 2번째인 8선의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도 한 번도 정치자금 비롯한 어떤 스캔들에도 회자되지 않은 점에서 고 이만섭 의장의 강직한 성격과 의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지난 금요일 국회에서 거행된 고 이만섭 의장 영결식에서 정의화 국회의장은 영결사를 통하여 국회의원은 계파나 당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부터 생각하라말씀하시던 의장님의 호통소리가 우리 귀에 들리는 듯하다고 말했는데, 과연 현재 사면초가에 몰린 정의화 국회의장이 어떻게 입법부 수장으로서의 권위를 지킬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김영래 아주대 명예교수, 전 동덕여대 총장

 

자랑스러운 연정인, 이만섭 선배님

 

최근 한국정치, 특히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이나 행태를 보면 정치인이라는 국회의원들이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만약 지금 이만섭 국회의장님이 생존해 계시다면 국회의원들에게 분명 크게 호통을 치시면서 개인이나 소속정당은 물론 청와대를 보지 말고 오직 국민만 보면서 정치를 똑바로 하시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요즈음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남북관계의 급속한 변화, 적폐청산문제, 추락하고 있는 한국경제 등 각종 국정현안에 대하여 국민들은 이만섭 국회의장님과 같은 원로정치인들의 쓴 소리 또는 조언을 간구하고 있다. 그러나 전직 국회의장들을 비롯한 원로정치인들이 쓴 소리는 고사하고 방송이나 신문에 인터뷰하는 것조차 혹시 밉보이지 않을까 몸 사리고 있는 현실을 보면, 더욱 정치인 이만섭 국회의장님이 그리워진다.

필자에게는 정치인으로서 이만섭 국회의장보다는 지금도 연정인으로서 이만섭 선배님에 대한 회상이 더욱 짙다. 지금부터 52년 전 서울시청 구내식당에서 개최된 연정의 밤에서 처음으로 뵈었던 연정인의 영원한 표상, 이만섭 선배님의 만남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새삼 자랑스러운 선배, 이만섭 국회의장님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