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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래 문화일보 時評>헛공약이 더 많이 쏟아지고 있다 - 문화일보 2017.02.09 -

dd100 2017. 2. 13. 11:42

대선 시계가 빨라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지난달 31일 퇴임사를 통해 “대통령의 직무정지 상태가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의 중대성에 비춰 조속히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점을 모든 국민이 공감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5월쯤 ‘조기(早期) 대선’ 가능성이 예견되고 있다. 조기 대선이 되려면 지금부터 불과 3개월 이내라는 극히 짧은 기간 안에 유권자들은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

조기 대선이 치러질 경우 가장 큰 문제는 후보자에 대한 짧은 검증(檢證) 기간으로, 이는 결국 부실 검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만약 검증이 부실해지면 이번 ‘최순실 게이트’에서 보듯이 결국 그 피해는 국민이 보게 됨은 물론, 국가 발전에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번 대선은 어느 때보다 대선 후보자에 대한 엄격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것 같지 않다. 최근 유력 대선 주자들은 조기 대선에 대비해 공약을 매일같이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단발성의 여론 떠보기나 임기응변의 즉흥적인 선거공약으로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 현실성도 없으며, 구체적인 재정(財政)계획도 마련되지 못한 이른바 ‘부실 공약(公約)’ ‘헛공약’을 남발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일부 대선 주자가 발표한, 예를 들면 연간 100만 원의 기본소득 제공, 군 복무 1년, 육아 휴직 3년, 사교육 폐지 등과 같은 포퓰리즘 공약이 유권자들을 현혹하고 있다.

만약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대통령 후보자는 당선 즉시 5년 임기의 막강한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게 된다. 과거와 같이 2개월 정도 준비시간이 주어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없이 바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과연 초고속으로 국정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수행해야 하는 제19대 대통령이 이 무거운 짐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참으로 염려스럽다.

 

이런 대선 시간표를 역으로 계산하면 지금쯤 유력 주자들이 소속 정당과 자신이 집권할 경우 즉각 국정 수행에 접목할 대선 공약을 작성, 유권자는 물론 언론·시민사회·학계 등으로부터 엄격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 주자들은 부분적으로, 그것도 매우 피상적인 차원에서 언론용으로 발표한 대선 공약은 일부 있으나, ‘매니페스토(Manifesto)’란 이름 아래 국가 비전을 포함,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대선 공약을 발표한 주자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영국, 독일 등 선진국의 경우 주요 정당과 후보자들은 총선 때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이 있는 공약을 재정계획과 더불어 정책 시행 시간표까지 작성, 총선 공약으로 발표하고, 유권자들은 이를 평가,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자에게 투표한다. 또한, 선거에 승리한 정당과 후보자는 이런 매니페스토를 소속 정당 홈페이지에 집권 기간 내내 게시하므로 언제든 유권자들은 이를 볼 수 있고, 또 공약 이행 진척도도 점검할 수 있다.

 

우리나라 선거에도 유권자와의 신뢰 형성을 통해 ‘헛공약’ 아닌 ‘참공약’을 제시하는 선거 문화 변화를 통해 정치 발전을 추구하는 매니페스토가 도입된 지 10년이 지났다. 2006년 5월 31일 치러진 제4회 지방선거를 기해 필자 등이 중심이 돼 네거티브 캠페인이 아닌 정책 중심의 포지티브 캠페인 운동인 매니페스토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이 운동은 유권자는 물론 언론 등의 많은 관심이 집중됐으며, 매니페스토 관련 조항은 현재 선거법 제66조에 규정돼 외형은 갖췄으나, 아직도 내실은 많이 미흡하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매니페스토를 제대로 만들어, 귀국 즉시 발표했더라면 급격한 지지율 하락에 따른 불출마 선언도 없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대선 당시 공약한 집권 매니페스토에 따라 국정을 수행했더라면, 또는 매니페스토 이행 평가위원회를 구성, 제대로 평가 작업을 했더라면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늘의 탄핵소추 사태도 없었을 게 아닌가.

이제라도 주요 정당과 유력 주자들은 ‘매니페스토 작성위원회’를 구성해 집권 로드맵을 발표하고, 특히 언론은 흥미 위주의 가십성 기사보다는 정책 경쟁을 유도하는 선거 문화 확산에 앞장서야 한다. 학계·시민단체·각종 전문직 단체들도 대선 주자와 주요 정당의 정책 책임자를 초청, 대선 매니페스토를 철저히 검증하고 공개해야 할 것이다.